며칠 전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다 엄마가 물었다.
“넌 왜 공부하겠다고 아이패드를 사 놓고 책은 서점가서 사니? 요즘 전자책 많이들 본다던데.”
내 대답은 짧았다.
“멀미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도 같은 이유로 종이로 된 책을 읽는다고 하셨다. 이 대화를 가져온 이유는 단순히 ‘멀미’라는 이유로 종이책 시장은 앞으로 건재할 것이며 전자책은 소수의 취미가 될 것이라는 멍청한 소리를 하기 위해 가져온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왓챠’ 등 수많은 OTT 서비스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OTT를 잘 이용하지 않는 나도 ‘오징어 게임’, ‘무빙’ 정도는 이름은 들어봤고, 소위 말하는 ‘짤방’의 형태로 여러 번 본 적 있다. 1분 남짓한 시간으로 이야기의 전체를 파악하긴 쉽지 않지만,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 같다. ‘오징어 게임’은 짤방으로만 보다가 최근에 아파 쉬는 날도 있었고, 남는 시간이 많아져 전체를 다 봤다.
다 보고 나서 감상은 “이 ‘드라마’가 지상파에서 방송됐어도 저런 줄거리와 감정을 끌고 전 세계가 열광한 드라마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였다. ‘넷플릭스’라는 거대기업의 지원이 없었으면 분명 PPL이니 뭐니 하면서 주변 광고로 가끔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PPL이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드라마 제작사도 먹고 살아야지. 또 그 PPL이 대중에게 일종의 유머로 소비되는 것을 보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요지는 ‘오징어 게임’은 플랫폼을 잘 만난 드라마라는 것이다. 모든 소재와 현상은 그것을 창작자의 의도에 맞게 잘 드러낼 만한 도구가 필요하다. 그게 OTT든, 지상파 드라마든, 종이책이든.
최근에 대학 친구들과 연천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점심을 먹고 바로 국사봉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던 중 5평 남짓한 공터에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8명 중 5명이 사진을 취미로 갖고 있었는데, 그 의자를 다들 자신만의 시선으로 담아갔다. 나도 한 컷 담아왔는데 아직 필름 현상 전이라 결과물이 궁금해 미치겠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들어가 간단(?)하게 술자리를 가졌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누가 문학 공부하는 애들 아니랄까 봐 주제가 금방 ‘시는 무엇인가’로 빠졌다. 그 주제가 얼마 안 간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1시간 넘게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 중 내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절대 시가 될 수 없는 소재들이 있는데, 그걸 시로 만들려고 하니 시가 안 써지고, 좋지 않은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로 든 소재가 국사봉 가는 길에 봤던 의자였다. 다들 그걸 사진으로는 찍어왔지만, 그걸 시로 쓸 생각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누군가 찔린 표정을 짓긴 했지만, 차치하도록 하자. 그 친구가 쓰는 건... 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말을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기고 나서 내가 쓸 시들에 대한 고민이 조금은 줄었다.
내가 쓰는 카메라는 두 개다. 하나는 필름 카메라(MINOLTA 7700i)이고, 다른 하나는 DSLR(NIKON D7000)이다. 카메라에 빛을 담는다는 행위가 매력적이라 생각해 시작해 봤는데,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은데,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 쾌감은 문학 작품을 쓰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요즘 핸드폰 카메라 잘 나오는데 굳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글쎄…. 한참 이야기할 것 같다. 아무튼 사진을 취미로 갖고 나서 내가 바라보는 것들이 다 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바라본 것들은 사실 그것들을 더 잘 나타낼 만한 방법이 있었다.
관련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올해 1학기에 ‘문예창작연습’ 수업을 듣다 생각한 것이다. 소설을 쓰는 친구(요즘 기습 숭배의 대상이 되는 그 친구 맞다.)의 시를 읽어봤는데, 주제가 참신했다. 여기에 주제를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넘어가는데, 누가 들어도 ‘어떻게 이런 소재를 생각해 내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궁금하다면 좀만 참아보도록 하자. 분명 그 소재로 다시 써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 소재는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로 참신한 것이지 ‘시’로 풀어내기는 어려운 소재였다. 아니 시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친구도 인정한 부분이다.
같은 물체를 보더라도 그걸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장르, 방법이 다 다르다. 사람들은 그걸 재능이라고 부르고, 난 애매한 재능을 붙잡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가 내 처지인 것 같은데, 여기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 내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공부도 중독이 된다.”가 바로 이것이다. 의대 갈 성적은커녕 수도권 4년제 대학 성적이 나오면서 수능에 중독된 사람, 합격선 근처에도 못 가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등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예술 분야에 특히 더 많은 것 같다. 애매한 재능은 저주라는 말이 있다. 난 지금 대단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대단함을 원한 채 ‘가능성 있는 상태’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종종 든다.
나는 대학에 올 때 저런 중독을 경계했었다. 여기까지가 내 최대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재수학원 담임 선생님은 1년 더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했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었다. 고3 때 대학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해 재수 생활까지 2년을 정말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거기서 더 부딪히고 깨지고 나아가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저 상태에 중독되는 것이 더 두려운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여러 가지를 하는 것 같다. 사진도 찍어보고 소설도 읽어보고, 에세이도 써본다. 효과는 아직 그렇게 크진 않지만, 어느 정도 심신에 안정을 주기는 하는 것 같다. 이런 시도들이 내 시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느냐에 대한 것도 잘 모르겠다. 난 아직 내 언어를 찾지 못했다. 더 많은 시를 읽어내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내 언어가 나올 것 같아 불안하다.
이런 불안들 때문에 내가 쓰는 글들의 주제는 대부분 암울하다. ‘희망적인 결과가 올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순간에 패배를 경험할 것이다. 아주 가끔 승리하겠지만, 또다시 패배할 것이다. 그렇게 패배해 나가는 것이 내가 살아갈 삶이라고 생각한다. 패배해 나가면서 배우는 게 있고, 어느 부분에서 승리했다는 착각에 위로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도 질 것이다. 세상에 승리한 인생만 있다면 시인이 필요할까. 시를 쓸 필요는 있을까.
이 “어이 장씨 닥치고 글이나 써‘는 여러 가지 고민이 섞여 시도해 보게 된 것이다. 제일 첫 주제(?)로 종이책의 미래를 잡은 이유가 이 시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OTT로 풀어나가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종이책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사진으로 표현해야 하는 소재가 있다면 시로 표현해야 하는 소재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럴 것이다. 가끔 대단함에 중독되어 패배에 찌들어 있겠지만, 또 부딪히고 나아가다가 어딘가에 쓰일 것이다. 그러다 다시 패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