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난주 금요일에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 왔다. 1편을 보지 않았음에도 꽤 재밌게 봤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살짝 답답하기도 했지만, 큰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최근 디즈니 영화의 논란거리 중 하나인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도 크게 들어가 있지 않은 점도 놀라웠다. 굳이 찾자면 다양한 인종이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 정도. 사실 크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1편을 안 보고도 재밌게 본 이 영화에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5점 만점에 3.5점을 주며 “그 모든 게 나였다. 그 전부가 세월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라는 말을 남겼다.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화 중 등장한 ‘불안이’에 대한 말이 많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고, 그저 잘하고 싶을 뿐이며, 자신을 숨기려 애써 웃는 모습이, 무기력한 현실 앞에 눈물짓는 모습이 자기 자신 같다는 말을 봤다.
난 사실 ‘불안이’보다 주인공이 라일리에게 더 관심이 갔었다. ‘불안이’도 라일리라고 봐야 할까. 아무튼 다른 종목, 다른 결과이지만. 라일리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사실 영화에 라일리가 하키를 계속하는지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나와는 다르게 아마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 라일리가 하는 행동들은 내가 했던 행동들과 너무도 비슷했다. (물론, 몰래 훔쳐볼 빨간 노트가 존재하진 않았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런 나왔던 행동들을 그녀도 하고 있었다. 라일리와 내가 결과가 달라서일까, 힘들었던 때가 떠올라서일까, 라일리의 행동거지부터 모든 게 불쾌하기도 했다. 질투라고 해야 하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누가 제어판을 만진 걸까.
내 감정들도 ‘불안이’, ‘기쁨이’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 만약 있다면 그때 내 속의 ‘불안이’는 너무 거대했다. 너무도 큰 그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짓눌렀다. 사랑을 숨 못 쉬게 만들고 기쁨을 아주 작은, 동전만 한 크기의 무엇으로 압축시켜 버렸다. 거대한 그는 ‘슬픔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고, 다른 감정들을 잡아먹은 그들은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들을 다시 작아지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부상이었다. 그 이후 내 삶이 좀 더 여유로워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왜 그렇게 열심이었나.’하는 생각을 꽤 자주 했었다. 그리고 체대 입시를 하면서 다시 그들을 거대하게 만들었고, 이번에도 부상이 다시 그들을 작아지게 했다.
요즘 내가 하는 선택들도 ‘불안이’가 하는 선택이 아닐지 싶다. 학원에서 일하는 게 꽤 힘들었다. 내가 주로 맡은 학년은 중등부였는데, 원장님은 계속 중등부가 블루 오션이라고 세뇌(?) 하셨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은 레드 오션을 넘어간 무언가였다. 아마 색깔은 무광 블랙. 가끔 주변에 내 정신 연령과 학생들의 정신 연령이 잘 맞아 즐겁게 일한다고 하긴 했다. 거짓말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재밌다고 생각하던 그것마저도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마 내 주변 사람들은 내 푸념을 계속 들어서 알 것이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데, 그들이 애써 어른이 되어준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것 같다. 내가 일하는 원동력은, 특히 가르치는 일의 원동력은 성취감에 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갖고 돌아왔을 때, 특히 일 년 내내 1등급을 놓치지 않았을 때 그 짜릿함과 말로 설명 못 할 감정들 때문에 이 일이 재밌었다. 하지만, 중등부 수업은 내게 성취감을 줬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다. 처음 중학생들을 만났을 때 크게 당황했었다. 곧 그게 평균임을 알고 내 기대치(?)를 크게 낮추기 시작했다. 기대치를 크게 낮췄어도 학생마다 능력이 다르다 보니 수업 준비도 오래 걸렸고, 가르치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덕분에(?) 학원에서 내 이미지는 나락으로 가버렸다. 수업 때마다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애들은 그걸 좋아하고, 난 또 애들이 좋아한다고 소리 질러주고….
중등부 수업이 내게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공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국문과 나와서 국어 학원 강사로 일하면 전공 살린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학생들을 가르칠 때 굳이 대학에서 배운 걸 활용할 필요가 없다. 이게 제일 크게 불안했다.
나중에도 쓰겠지만, 대학원에 가는 이유에도 불안이 있다. 이대로 나 같은 사람이 사회로 나가도 되나 싶은 생각도 대학원행을 결정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불안해도 되지 않을까.’였다. ‘불안이’가 제어판을 만지고 때론 미쳐 돌아가도 된다. ‘불안이’가 폭주해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나를 실패하게 만들어도 좋다. 어차피 내 삶은 계속 실패할 거니까. 꾸준히 실패해 왔으니까. 계속 실패하다가 가끔 성공하는 기쁨에 살아갈 내 인생은 ‘불안이’가 가운데 앉아 계속 추억 할머니를 내쫓지 않을까. 훔치는 방법을 알아야 달릴 줄 알 듯 불안할 줄 알아야 기쁠 줄 아는 게 인생이 아닐까.
꾹꾹 눌러 담은 말을 좋아한다. 매우 좋아한다. 아이스크림 따위를 꾹꾹 눌러 담은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다. 감당 못 할 만큼 커다란 감정을, 내뱉고 싶은 말을 참고 또 참았다 터뜨리는 그 마음이 좋아서. 정성이 겹겹이 쌓인 말을 좋아한다. 그저 그런 말도 꾹꾹 눌러 담았다면 어딘지 모르게 특별해진다. 꾹 눌러 담은 마음을 받는 사람은 그 심정을 알까. 차고 넘치는 마음을 간신히 눌러 담던 그 마음을. 사랑이 ‘없음’을 채우는 행위라면, 나의 ‘없음’은 너의 ‘있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꾹 눌러 담은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채운 나의 ‘없음’을 너에게 전달하면 다시 사라지는 무언가 있겠지만 사라지는 마음 또한 사랑이 아닐까. 미분했다가 적분하면 적분상수가 생기고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주는 것도 ‘불안이’가 하는 것 같다. 그저 나의 진심이 닿길 바라지만, “혹시 몰라서 가방 6개를 챙기듯” 건넬 마음을 내 ‘없음’에 담아두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