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말하는 게 익숙지 않다. 어디를 향하는 마음이든 그걸 표현하는 게 힘들다는 뜻이다. 처음 시를 쓰겠다고 덤빌 때 지도 교수님이 ‘연애 시’ 쓰면 찢어버리겠다고 협박하신 탓일까.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언어로 뱉어내기 쉽지 않다. 내 사랑은 너무도 격정적이라, 아직 진행형이라 정리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내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 한 것이고, 내 언어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것이겠지.
아직 내 사랑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이유로 검정 치마의 노랫말들을 싫어했었다. <Big Love>의 가사를 볼까. “내 사랑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해….” 아마 처음 접한 검정 치마의 노래가 이 노래여서 반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지가 뭔데 자기감정이 반듯하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TEAM BABY] 전체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앨범을 듣다 보면 그는 사랑을 하면 할수록 성숙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한다. 그 사랑은 꽤 화려해 보이기도 한다. 서로 하나하나 맞춰가는 연인의 모습은 서로가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Big Love>의 가사처럼 자로 잰 듯이 반듯한 사랑. 너와 내가 전부인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다음 앨범인 [THIRSTY]로 넘어가면 그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의 끝을 말한다. 사랑이 다 타버리고 남은 갈증과 공허에 대해 말한다.
“줄은 처음부터 없었네.” [TEAM BABY]의 <Love is all>에서는 줄이 줄어들어도 옆에 남아있을 연인이 있었지만, <피와 갈증(King of Hurts)>에서는 그렇지 않다. 육체적 욕구의 해소만을 바라는 마음마저도 그런 음지의 마음마저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그의 곁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고, 홀로 죽어가고 있다. 가사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그는 음지의 사랑으로 상처받았고, 무너져 갔다. 그렇게 무너지는 그를 여자는 여전히 사랑했었고, 그 사실을 안 그는 한없이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순수한 사랑을 하며 영원을 확신하고, 그녀만 있다면 뭐든 이겨낼 수 있다는 치기 어린 마음과 정반대인 감정을 그려냈기에, 이 노래, 이 앨범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검정치마의 팬인 나는 그가 다시 <Big Love>로 돌아갈 것을 안다. 그에게 사랑은 전부이고, 모든 게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예전 글에서 선언한 적 있다. 내 삶과 닿은 인연이라면 무작정 사랑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끝끝내 나를 형편없게 만들지라도. 실패를 예견하는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공포마저도 대신 물리쳐 주겠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내가 이미 내 삶과 맞닿은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내 사랑은 외사랑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두 존재가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보통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길 요구받는 사람이 있다. 그럼 어떤 구조 속에 A가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어떤 조건 속에서 B가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하는 것일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라고 했다.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질문이기도 하다. 그 질문은 내 결여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없음’을 너의 ‘있음’으로 채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보자. ‘없음’들이 서로를 알아볼 때 사랑이 발생할 것이고, 우리 안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생겨날 것이다. 그 단단한 무언가가 생겨났다고 해서 ‘없음’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행위는 그 ‘없음’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행위이다. 즉, 나의 ‘있음’이 너의 ‘없음’을 채워주고, 너의 ‘있음’이 나의 ‘없음’을 채워주는 게 사랑이라면, 사랑의 실패가 흔하디흔한, 필연적인 무언가로 느껴진다. 우리의 ‘있음’은 언젠가 소진될 것이고, 너의 ‘있음’이 없어지면,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유통기한 지난 상품이 폐기 상품이 되듯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폐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이미 말했다. ‘없음’이 사랑의 발생 조건인 것은 맞지만, 유지 조건은 아니다. ‘없음’을 채우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아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 ‘없음’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이다. 나의 ‘없음’은 너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 ‘없음’이 더는 고통이 되지 않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너는 나를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사랑의 유통기한을 폐기하고 싶다면, ‘없음’을 기억하자. 너의 ‘없음’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나의 ‘없음’이 너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너의 ‘없음’도 나도 채워지지 않는 게 당연하니까.
이왕 사랑을 한다면, 정확한 사랑을 하고 싶다. 이왕 사랑을 받는다면, 정확한 사랑을 받고 싶다.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연기(演技)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린 결국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학원 강사를 하든, 영화를 찍든. 남들이 내 것을 좋아하지 않을 때는 그에 대해 비판받기도 한다. 그 비판에 익숙해지거나, 그 비판에 못 이겨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과정이 너무 아프지 않을까. 그렇게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면, 그들은 나 자체를 사랑하는 걸까, 그들의 취향에 맞게 변한 나(혹은 그렇게 만든 자신들)을 사랑하는 걸까. 후자가 아닐까. 정확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당장 등단할 수 있는 시(詩), 다른 사람들이 사랑해 줄 시를 쓰는 게 아닌, 내 언어로 쓰인 나를 쓰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