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복날이었다. 농사가 주된 생활상이던 옛 선조들이 무더위를 이겨낼 힘을 얻기 위해 육류나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 유래인 날이다. 채식 위주의 식단을 하던 선조들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날일까. 이미 우리의 식탁은 고단백, 고지방 음식들로 가득 찼다. 복날이 있는 달에는 평소보다 2배 많은 닭이 도축된다. 소비한다는 것은 지지한다는 것. 제발 멈추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늘 머릿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오늘 크게 깨달은 세 가지가 있다.
-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을 공격한다.
- 불편한 진실은 계속 모르고 싶어 하며 때론 거짓으로 치부한다.
- 진실을 마주한다고 모두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관념이 부정당하는 것은 꽤 큰일이니까. 그걸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본인의 자존감 크기와 비례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잘못됐다는 것을 듣는 것 같으니까. 그렇기에 비건인 내 친구는 그들을 기다릴 뿐이라고 했다. 본인이 그랬듯 비건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도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들을 기다리는 내 친구의 자존감이 걱정될 뿐이다.
그런데 그를 걱정하는 나는 비건이 아니다. 최근에 조금 관심을 가질 뿐이지 지금까지 한 번도 채식주의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샐러드를 먹으면서도 고기가 있어야 했다. 완벽한 탄단지를 핑곗거리 삼아. 사실 이런 내 걱정을 그저 ‘척’으로 볼 수도 있다. 걱정하는 척, 자연을 위하는 척, 동물을 위하는 척. 진짜 친구가 걱정되면, 도축 당하는 동물이 불쌍하면 당장 비건을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인간의 비(非)인간 동물을 향한 폭력은 너무 거대하고 나는 아직 내 관념이 바뀌길 기다리는 중이다.
나는 ‘척’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잘 아는 척, 걱정하는 척, 공감하는 척. 우리는 왜 척하며 연기를 해야 할까.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사회성 운운하려면 여기서 나가길 바란다.)
좋게 포장하자면 솔직한 것. 사실 속마음은 사회성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척’을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마음은 일종의 정복감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전 글에도 썼듯 그렇게 사람들의 호감을 받으면 그들은 나 자체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렇게 나를 바꾼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그 글을 쓴 지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직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이 ‘척’이 불쾌할 때가 있다. 우린 솔직한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서.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고 싶어서. 그렇기에 가끔 합평할 때나 평론을 보다 불쾌한 마음이 들면 대개 저런 경우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속은 텅 빈 그런 말들이 난 너무 싫다. 아마 그런 말을 하는 화자가 미워지는 것은 그에게서 용서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보여서가 아닐까.
난 질투가 많은 사람이다. 자신만의 언어가 확고하고, 그 언어가 사람들에게 갈 때 그의 의도가 잘 전달되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고, 그게 내 재능이다. 자괴로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릴 땐 재능있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재능충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이라 표현할 단어가 없었지만, 미워했다. 내 노력을 가뿐히 뛰어넘는 모습이 미웠다. 내가 흘린 눈물과 땀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그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었을지도. 그래도 그때는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고 어린 나이에 치기 어린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자신의 재능을 잘 알고 잘 활용하는 사람을 질투한다. 그들도 땀을 흘리고 때론 울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존경심도 든 적이 있다. 이런 내 질투는 그냥 시기, 질투로 끝나는 건 아니다. “시적 허영 속에 살고 있는 말들은 초라하”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상 초라한 상태로 두고 싶지 않다. 기도보다 아프게 그들을 바라보고 사용해 줘야지. 그러다 보면 나도 내 언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또 나는 왜 시를 쓰고 싶어 하는지 고민했다. 동시에 내가 시를 쓸 때 버릇도 생각해 봤다. 나는 시로 써보고 싶은 게 생기면 한참 바라본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바라본다는 것은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멋진 말을 쓰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그렇게 시를 쓰다가 여전히 슬프고 아프고 그래서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건 그런 무서운 삶마저 끝까지 살아보겠다는 선언 아닐까. 그 모든 순간을 견디려고. 시는 일기 같은 거라서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중에 그 순간들을 견뎌왔다는 것이 믿을 수 없어질 때까지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