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장석현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7월 26일 0시 28분)을 기준으로 엊그제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여우비가 내렸습니다. 중학생 때 본 이후로 굉장히 오랜만에 목격한 여우비였어요. 햇빛에 비치는 빗방울이 참으로 예뻤습니다. 여우비를 볼 때 엄마랑 대화 중이었는데, 엄마도 당신이 좋아하는 비를 오랜만에 봐 좋다고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았어요.
여우비가 내리는 날은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들 하죠. 산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여우가 호랑이 때문에 주인이 되지 못하자 호랑이에게 장가를 가고 여우를 짝사랑하던 구름이 슬퍼 우는 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날에 제가 본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아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연인과 함께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사람들도 목격했고, 응급실에 전공의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사람도 봤습니다.
여기서 저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요. 제가 어떤 모습을 취하는 게 필요할까 궁금합니다. 최근 뒤렌마트의 희곡집을 읽고 생각이 참 많이 했습니다. 사회 속의 한 개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전엔 김수영이나 신동엽의 시론집을 읽고 ‘시인’의 사명에 대해 생각했어요. 제가 배우는 문학이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그 문학을 써내야 하는 저는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까.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왕》의 ‘오이디푸스’도 그렇고, 《노부인의 방문》에 등장하는 ‘일’도 그렇고 제게 어떤 사명이 주어질 것이라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처음 ‘시인’이 되고 싶다고 밝혔을 때가 아직 생생히 기억나요. 무작정 시를 쓰고, 시인들을 쫓아다니며 배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술자리를 가지던 중 김건영 시인과 흡연하러 나왔을 때 제게 시를 왜 쓰는지 물어보셨어요. 제 대답이 아픈 삶을 너무 많이 목격했고, 마음속에 담긴 말을 풀어낼 수단이 시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선생님께선 시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고 그걸 표현할 재능을 갖고 있는데 왜 하필 이 길을 알고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하셨어요. “네 인생도 참 똥이다. 똥.”이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포기하면 제가 아니죠. 오히려 더 용감하게, 때론 무식하게 덤볐습니다. 그러다 잠깐 길을 잃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시는 길을 잃어버려도 좋을 숲이기에, 방황하는 순간마저도 제게 시로 다가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잔나비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런 게 사랑이란 거라면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그럼에도 꾸던 내 꿈을"
전 이제 제 앞에 놓인 것들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사실 제게 주어질 사명 따위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가 가려는 이 길이 자주 힘에 부칠 때가 있을 것을 압니다. 어지럽고 막막하며 외로운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아픈 일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길 잃음과 혼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자주 강한 사람이 되려 합니다. 그동안 제 앞에서 버텨준 이들이 있기에, 그래야만 할 것 같습니다. 자주 이런 선언을 했던 것 같고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제가 이 길을 버틸 것 같아요. 또, 제가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제가 한 번씩은 의지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맘대로 의지해 버린 대가를 치러보려 합니다. 여러분이 매번 기쁘고 행복할 순 없겠지만, 대체로 행복한 삶을 위해 그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합니다.
추신 1. 오늘 글의 분량은 그동안 보낸 글의 절반입니다. 술 먹고 와서 힘든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 말을 해야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