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장석현입니다. 마지막 글을 써 보낸 지 한 달이 넘었으니 꽤 오랜만에 글을 써서 보냅니다. 그동안 메일이 가지 않았던 것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핑계처럼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제일 큰 이유는 오랜만에 시를 쓰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1년에 한두 달 정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시작(詩作)하는 것에 제 언어를 소진했기 때문에 메일을 써 보내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좋은 시를 쓴 것 같지도 않아 부끄럽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는 것도 사실 거짓말입니다. 일을 그만두고도 할 게 많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8월이 돼서야 한가해졌습니다.
8월 첫 주엔 여행을 두 번 다녀왔습니다. 가족들과 강화도에 다녀왔고요, 대학 친구들과 강릉에 다녀왔어요. 같은 시간을 보내도 두 집단에서 제 모습은 극과 극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시’란 무엇인가, 인간관계 등에 대한 고민의 답은 대개 친구들과 있을 때 무언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부모님께 시를 공부하고 있다고 제대로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강화도에 갈 때 아버지와 대학원 얘기를 잠깐 했습니다. 대학원에 가는 목적이 진짜 지금 하는 공부가 재밌어서인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무서워서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취지의 대화였어요. 그때 저는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차는 제가 몰고 다니는 차보다 크고 낮아서 익숙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운전에 집중하고 싶은데 옆에서 말 거는 아버지가 살짝 귀찮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올라올 때 아버지는 전날 드신 술 때문인지 푹 주무셨어요.
강릉에 내려갈 때 여러 주제로 친구들과 떠들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비트박스(한국도로공사 교통사고 대처 홍보 캠페인 슬로건)’가 너무 강렬해 그런 것 같아요. 올라올 때도 비트박스를 찾으며 올라왔습니다. 강릉에 도착해서 강릉 출신인 최병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돌아다녔습니다. 숙소 앞 바다에선 럭비를 했고요, 선글라스가 부러져 바다에서 사라졌습니다. 부러진 선글라스가 바다를 검게 만들기 전에 숙소로 돌아갔어요.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맹목적인 사랑이 궁금해졌습니다. 안희재 작가의 <망설이는 사랑>을 읽고 친구들과 독서토론을 나눈 게 계기가 됐어요. 책을 읽을 때는 분노에 가득 찼습니다. “이런 걸 책으로 내고 인세를 받아 가다니.” 전 아이돌 팬이 돼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에 가본 적도, 굿즈를 만들어 배포한 적도 없어요.
전 사랑에 꽤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기에 제 언어가 아직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번 <사랑의 논리학>에서도 말했듯 “없음”이 사랑의 발생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무엇이 결여됐기 때문에 발생한 걸까요. 이 질문의 해답을 그 책에서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저 문화 향유인 중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던 “빠돌이”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준 것이 전부인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짝 위험한 얘기를 해볼까요. 최근 방탄소년단 소속 슈가(본명 민윤기)의 음주운전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모든 언론은 말 그대로 불타올랐습니다. 동시에 우리 엄마도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어요. 방탄소년단 팬이시거든요. 사람들의 반응은 늘 그렇듯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가짜뉴스를 생산해 악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고, 다른 연예인들도 많이들 하던데 왜 “우리 슈가”한테만 욕하냐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응원하자며 음주운전을 인증하는 팬들도 나타났어요.
전 이번 일에 대해 별생각이 없습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유명인들의 음주운전 이슈라고 생각해요. 그냥 엄마의 말대로 안타깝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음악으로 보답하겠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속된 말로 좀 짜친다고 생각해요. 그냥 조용히 좋은 음악을 다시 들려줬으면 합니다.
요즘 느끼는 건데 참 시간이 빠른 것 같습니다. 다니던 학원을 그만둔 게 벌써 2달이 넘어가고요, 전 학부생 막 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흘러갈 뿐이고, 변한 것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일 것입니다. 변한 것은 우리인데, 우리는 때때로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때론 이 마음의 시계는 일방향적이지 않게 흐릅니다. 때로 오래전의 시간이 현재의 삶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하곤 합니다. 또, 이 오래전의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래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체하지 못할 겁니다. 그때의 내 삶은 ‘사는 것’일까요 ‘살아지는 것’일까요.
할머니가 죽고 보름이 채 되지 않아
할어버지도 죽었다
둘은 납골당에 갇혀 영원히 죽어진 채로 있다
엄마, 미안합니다
허리 병이 든 아버지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하는 말
나는 짐짓 모른 체 술을 따르고 첨잔을 하고
납골당 주위에 술을 부으며
고귀수 할머니가 고귀순이라고 적던 한글 공책을 생각한다
아버지와 형, 어머니 이름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주위에 구름을 두르면
꽃이라도 될는지.
내 희디흰 이름에 폭폭 눈이라도 왔으면 했다
매번 져주던 사람의 이름이 지독히 기억나지 않던 밤
그렇게 살지 말라는 전화와
어떻게 지내냐는 문자를 받았다
매번 지려고 하는 짓
그 몸짓의 애쓰는 마음이
꽃의 말이라 한다
-오병량, 「호랑이꽃」 부분
행복은 추억을 남기지만 불행은 흔적을 남깁니다. 이 시는 타인의 죽음이 왜 ‘나’의 불행인지 묻게 만듭니다. 만약 그 죽음이 나의 존재를 만들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든 존재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췌한 부분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존재와 남겨진 존재가 공존하는 이 시는 누군가 떠나고 남겨진 빈자리의 주변을 맴도는 화자의 마음이 아주 잘 느껴집니다. 어떤 소설 속의 대화가 떠오릅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대화를 하던 소설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오병량 시인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지려는 마음으로 살아서 남겨진 사람의 삶을 힘겹게 앓으면서 사는 게 아닐까요.
김소월의 시 중에 「개여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라고 떠나간 사람이 말하는데, 이렇게 얄궂은 이별의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별의 이유를 상대방에게 돌리며, 떠나간 사람은 사라져 버립니다. 남아있는 것은 몇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움이라는 말은 사랑처럼 너무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시인들의 사전에서 그리움이란 상호적이며 지극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 속에서 보이는 그리움은 일방적이고, 조금은 잔인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그리움이 우리가 이별 후에 마주하는 진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할 겁니다. 호랑이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이 식물의 꽃말은 ‘나를 사랑해주세요.’입니다. 화자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매번 지려고 하는 짓 / 그 몸짓의 애쓰는 마음”이 호랑이꽃은 꽃말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쓸쓸한 시입니다. 여름은 때로 이렇게 쓸쓸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고, 초록은 더 초록이게 됩니다. 더위와 함께 찾아오는 슬픔은 더욱 선명해지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감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마치 습지와도 같이 무겁고 눅눅하고, 발을 들이면 우리의 몸을 모두 집어삼킬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여름 속에서 어떤 시간을 헤아리며 살아왔을지 궁금합니다. 부디 미련 속에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련은 ‘아닐 미’(未)자에 ‘익힐 연’(練)자를 씁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고, 연습이 되지 않았다는 말일 겁니다. 끝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마음이 바로 미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끝내기에 익숙해진 마음이라면 최소한 그건 미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련 없는 마음도 어딘가 쓸쓸해 보일 것 같습니다. 끝을 내는 일에 익숙해져서 조약돌처럼 변해버린 마음이라니, 참으로 쓸쓸해 보입니다. 다시 보니 미련 속에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 미안해집니다. 시인은 참 미련이 많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사라진 존재에 대해, 끝나버린 사건과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계속 말하고 기억하려고 하니까요. 끝을 끝이라고 여기지 않을 미련의 일이 ‘시’라면, 제가 매일 시를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도 어쩌면 영원히 끝을 미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철학자는 편지란 항상 조금씩 잘못 전달되는 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덧붙여 우리의 삶이란 이렇게 잘못 전달된 편지들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어요. 이건 꼭 편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우리가 나누는 모든 말들은 조금씩 왜곡되어서 오해를 만든 채로 전달되게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결국 오배송의 운명을 짊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한 시는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라는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오병량 시인이 제목을 이렇게 지은 건 어쩌면 시도 편지처럼 배송 사고의 운명을 짊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배송 사고를 기대하며 전하는 편지일지도 모릅니다. 달이 참 밝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 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진다는 말이 외롭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 시니까요. 기다리던 택배가 늦으면 답답하고 막막해지겠지만, 시는 조금 잘못 배송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내는 이 편지도 배송 사고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