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장석현입니다. 또 오랜만에 글을 써 보내 드립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학원 원서 접수가 모두 끝났습니다. 한참 정신이 없었는데,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또, 2주 전에 조부상을 치르고 왔습니다.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사랑한다는 말도 못 했다는 어느 가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하고, 학업 계획서를 쓰느라 바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보냈습니다. 입관 때 드리고 싶던 말을 했지만, 들으셨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망 후 48시간 동안은 귀가 열려있어 들을 수 있다지만, 요즘 세상엔 너무 잔인한 것 같습니다. 그 48시간 동안 듣는 건 냉장고의 모터 소리가 전부일 테니까요.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냉장고 모터 소리만 듣게 할 바엔 그냥 불효자로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저번 글에 오병량 시인의 「호랑이 꽃」을 전해드렸는데,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발췌해 보여드렸습니다. 참 좋기도 하고 쓸쓸한 시였죠. 제가 지금 시를 쓴다고 하면 그런 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아직 제 감정은 날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죠. 시는 참 어려워요. 시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소개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시는 잠수해 볼 만한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어떨 땐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땐 그게 아닌 것 같고. 분명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 있는데, 그걸 잘 설명해 보라면 못 할 겁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시’라는 받침도 없는 이 무거운 단어를 잘 설명해 보려고, 그 정동을 설명해 보려고 대학원에 가는 겁니다. 벌써 조금 후회되긴 합니다.
그럼에도 시는 참 좋습니다. 알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시의 모습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내 생각이 어디까지 시라는 바닷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지 가르쳐준 게 시입니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부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 「사랑의 변주곡」 중 일부를 갖고 와 봤습니다. 처음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시였어요. 방 안에 누워있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주전자 물 끓는 소리가 본인에게 들어오는 것을 고양이의 움직임처럼 써냈고, 그 이미지가 감명 깊었습니다. 동시에 제가 본 시인들의 언어는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학원 강사로 근무하면서 좋을 때가 더 많았지만 씁쓸할 때도 많았습니다. 대학에서 배우는 문학과 국어학은 해석 방법도 다양하고 그 다양성에서 오는 재미가 있는데, 학생들에게는 일률적인 답만 제공하고, 학생들은 점점 국어를 암기과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로 일하는 1년 반 동안 획일성을 강조하는 강사로 살다 보니, 학생들의 꿈을 짓밟는 기분이 들었어요. 학생들이 문제 풀이를 위한 독서가 아닌, 한 명의 독자로서 독서할 때 학생들에게 시와 문학 텍스트가 주는 정동이 느껴질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볼까요.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이 두 행에서 ‘사랑은 하고’에서 조사 ‘-은’이 주는 정동과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날리는 이미지가 어떤지 느껴지시나요.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힘으로 날씨가 변한다고 믿습니다. “날씨 요정”이라는 말과 함께요. 비슷한 예를 들어볼까요. 친할머니를 보내 드릴 때와 이번에 친할아버지를 보내 드릴 때 두 번 다 발인 날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가족 모두가 “자식들 고생하지 말라고 날 참 좋게도 만드셨다.”라고 했습니다. 다행이죠. 마지막 가시는 길 날이라도 좋아서요.
잠깐 할아버지 얘기를 좀 해볼까요. 할아버지께서는 경상도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굉장히 엄하시고 무뚝뚝하셨어요.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저도 무뚝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을 잡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나란히 걸으시는 모습도 일본 여행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할머니보다 한참 앞서서 걸으셨습니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양복점을 운영하신 적 있습니다. 아버지, 삼촌의 첫 정장은 다 할아버지께서 만드셨대요. 어렸을 때 양복점에 가면 특유의 냄새가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냄새를 맡고 묵묵히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더 무서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할아버지의 행동들이 가족들을 향한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편히 걷도록 먼저 가서 살피시고, 2~30년 뒤에 손자가 입을 정장을 미리 만들어 놓으신 것들이 넘치는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배우지 못하신 할아버지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요.
언젠가 할아버지의 양복점 냄새를 갖고 시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시가 되기엔 감정이 정리되지 못한 탓에 산문으로만 써두긴 했어요. 시가 될 꿈을 가진 산문은 언제나 기분 좋게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은 것과 글이 수월하게 써지는 건 다른 얘기긴 해요.
울음에서 왔다 우리의 벌어진 이름은
삐약이라든가 야옹이라든가 은사시나무라든가
엄마- 하고 입 벌리는 무덤 앞이라든가
문자를 버리면 휘발유처럼 번지는 땀띠
엄마를 묻고 할매랑 떡을 씹는다
할매의 손에선 모든 게 기이해진다
꼭 쥐고
떨고
귀기울이면
조랭이떡이 손아귀에서 쏙쏙 나왔다
동양처럼 순하게 일그러지는 게
집안의 고요한 성정 같았다
그리고 나는 배탈을 앓으며 모든 걸 본다
브로콜리가 보리꼬리로 넘어오는 것
아일랜드가 애란(愛蘭)으로 수런대는 것
폴란드가 파란(波蘭)으로 물결치는 것
술렁술렁슬럼슬랭술과럼과릉(陵) 사랑과 난초, 파도와 어깨 그 사이에서
옛사람들은 어떻게 지도를 참아냈을까
어느 나라가 겨드랑이에서 간지러웠을까
림프선이 임파선(淋巴線)으로 파괴되면서
귀뚜라미가 울고 여름은 끝장났다고 귀뚤
삐뚤 삽시간에 숨이 기울고
눈을 감으면 흉부에서 귓속말이 들리고
용감하게 살아 국도 데워서 먹고, 반들대는 곤충의 등을 보면서
동백유로 그 아이의 머리를 빗겼지
국숫발 같은 흑발을 차르륵 흘리며
걔는 늘 그렇게 혼자 차분했다
그래서 내가 걔 아픈 건 하나도 몰랐다
이것이 엄마가 소리처럼 흩어진 이유
-고명재, 「우리의 벌어진 이름은 울음에서 왔다」
저는 생물들의 이름을 찾아보는 게 취미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 생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 생물에 담긴 마음을 짐작하는 게 재밌었습니다. 찾아보고 가장 신기했던 이름은 ‘애기아르마딜로’라는 동물입니다. 종 이름이 ‘애기아르마딜로’라고 합니다. ‘할미새사촌’이나 ‘사마귀붙이’같은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 세 글자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름만 알지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어떤 생물인지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고명재 시인은 그 이름들이 울음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그토록 애틋한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울음소리를 대신해 준 ‘엄마’는 소리처럼 흩어지고, 엄마의 엄마인 할매는 딸의 머릿결을 기억하면서 그의 성정을 연결합니다. 그런 할매의 행동은 아마 최선을 다해 기억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일 겁니다.
제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클 석(碩)에 옥돌 현(玹)을 쓰는데요, 뜻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갖는 효과는 참 대단합니다. 대학에 와서 첫 지도교수님 성함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기, 선배들과 친해지기 쉬운 건 그 효과 중 극히 일부일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특히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너무 좋은 이름을 주지 않는 것도 그 삶이 이름에 미치지 못하면 삶이 오히려 해를 입을 거로 생각했던 것인 듯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함부로 지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답니다. 흔한 이름이 액운을 막아주길 바라면서 개똥이 같은 이름을 지어주고 아이가 불행하지 않길 바랐다고 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참 다정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정말 이름만 놓고 봤을 땐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숫자나 글자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숫자나 글자만 안다고 그 사물이나 생물에 대해 통달했다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시는 그 알 수 없음을 다시 되짚어 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시를 소개하고 글을 써 보내는 것도 함께 시를 읽고 세계의 알 수 없음과 세계를 채우는 사물들을 다시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물론 꼭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