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3월입니다. 2주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죠. 누군가는 졸업을 하고, 입학을 하고. 누군가는 개강, 개학을 하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태어나고 죽고, 사랑을 하고.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국어학을 좀 더 파보기로 하고 수강 신청을 했고요, 제가 쓰는 시에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외부 합평회를 나갔어요. 솔직히 벌써 좀 후회됩니다.
외부 합평회를 나가면서 제가 처음 시를 쓸 때를 생각해 봤어요. 22년 2학기에 학교에 복학하면서 장석원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됐는데, 그때 본 선생님의 시와 제게 읽으라고 추천해 주신 시에 걸려 저는 시를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 보건소에서 딱딱한 공문만 쓰던 제게 시의 언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언어인 것만 같아 배우는 데 오래 걸렸어요. ‘1.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방역법 0조에 의거 귀사는.....’ 이런 문장만 쓰다가 시를 쓰려니 밤을 새워 노트북과 씨름해도 문장이 안 나와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최근엔 시와 싸워 일명 ‘시태기’도 겪었습니다. 하루에 몇 편씩은 꼭 시를 읽었었는데, 아예 시집을 쳐다도 보지 않던 날도 있었고, 한 달에 1~2편 쓰던 시를 2달 동안 아예 안 쓰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장르의 문학도 읽어보고, 이 에세이를 쓸 생각도 하고, 사진이라는 새로운 취미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요즘이 제게 전환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직 시적(的)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시적인 것 같은 소재나 순간을 쓰면 전혀 시적이지 않을 때가 많고, 제가 무심코 지나간 순간들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쳤을 때는 시적인 것들이 많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시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제게도 시적인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제 시를 보는 선생님들께는 뭔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금요일)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게 시를 가르쳐 주시던 장석원 선생님께서 정우신(시인) 선생님께 제 칭찬을 하셨데요. 제게는 칭찬을 거의 안 해주시고, 단점만 읊어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게 만드신 분인데 뒤에선 제 칭찬을 하시고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고 계셨어요. 덕분에 정우신 선생님께서 저를 아주 벼르고 계시는 것 같아요. 벌써 3월 22일 수업이 무서워집니다. 그때는 또 뭘 써서 가져가야 할까요.
3월 초 모두가 개강을 맞아 학교에 갈 때 저는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월말에 있을 학술답사를 위한 사전 답사를 다녀왔는데, 가서 미리 봄을 만나고 왔어요. 저는 1년 동안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그들은 변함 없이 활짝 피어있었습니다. 왜 조선시대 사대부가 꽃이라던가 소나무라던가 사군자(매난국죽)을 좋아했는지 조금은 이해됩니다. 참 이뻐 카메라로 다 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꼭 다들 제주에 방문해 보세요. (광고비 받지 않았습니다. 설마요.)
변함없이 피어나는 꽃들은 아마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든요. 다른 이가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 주변엔 많습니다. 때론 비주류 종목을 하는 선수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고명재 시인의 <비인기 종목에 진심인 편>에 등장하는 가라테 선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탈락하고 수건에 얼굴을 파묻으며 우는 선수들이 여러분 같습니다.
우린 결국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를 쓰든, 영화를 찍든, 비평을 쓰든, 학원 강사를 하든. 남들이 내 것을 좋아하지 않을 때는 그에 맞는 비판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혹은 우리가 비판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비판은 때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기도 하고,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반항 심리를 심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제 애매한 제주가 제 입을 틀어막는 날이 더 많아져 부끄럽습니다.
저만 이리 부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걸까요.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도 본인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에서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맞붙어 봅시다. 그러면 내일의 우리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저도 더 단단해져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어이 장씨 닥치고 글이나 써’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무너져 가는 삶에 뭐라도 써야지 싶어 쓰던 글을 읽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번 제목이 '글이라도 써'입니다. 정말 어느 순간은 글이라도 안쓰면 미쳐버리겠는 순간을 지나왔거든요.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제 글을 던지려 준비 중입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여러분도 조금 덜 패배하고 조금 더 단단해져서 만나면 좋겠습니다.